top of page
  • Writer's pictureSolomon Inhak Kim

자동차 발명의 역사

1. 머릿말

교통수단의 혁명을 가져온 자동차의 발명은 일반 종류의 발명품과는 달리 어느 한 개인이 한 순간에 만든 것이 아니라 지난 500년 간 무수한 엔지니어들의 끊임없는 연구 개발 노력의 결실임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필자는 자동차 보험의 역사와 최근의 자동차 보험 동향을 기술하기에 앞서 자동차 발명의 발전 역사를 한 번쯤은 꼭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기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으며 자동차의 발달에 따라 자동차 보험료도 종속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2. 자동차 역사의 시작


2.1. 증기 자동차의 발명


이태리의 Guido Da Vigevano 는 1335년에 바람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최초로 설계했으며 1478년에는 Leonardo Da Vinci 역시 스스로 주행이 가능한 세 바퀴로 된 자동차를 설계한바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단지 종이 선상의 수학에 불과하였으며 실제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1678년 당시 중국의 선교사로 나가있던 벨기에 출신 신부인 Fernand Verbiest가 Chien Lung 중국 황제를 위하여 근대의 Turbine 원리를 기초로 제작한 60 cm크기의 증기 자동차를 제작하였다고 알려져있으나 공식 문서로 남아있지는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영국의 왕립자동차 클럽 (British Royal Automobile Club)과 프랑스 자동차 클럽 (Automobile Club de France) 등 많은 자동차 역사가들은 프랑스의 포병 장교이던 Nicolas-Joseph Cugnot가 1769년에 대포를 운반하기위하여 개발, 제작한 삼륜 증기 자동차를 최초의 자동차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Cugnot 가 제작한 일명 “Fardier”는 엄청나게 크고 중량이 무거운 증기보일러를 앞에 탑재한 채, 시속 2.3마일로 운행하므로써 마차나 사람걸음보다 훨씬 더 느렸으며, 이듬해 제작한 모델이 파리 외곽에서 시험 주행 도중 브레이크가 없는 관계로 언덕길에서 정지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세계최초의 자동차 사고로도 기록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풍력을 이용한 모델이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1472년 Robert

Valturio는 바람을 이용하여 수레바퀴가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풍차 (Windmill)를 접목하는 방법을 최초로 제안한 기록이 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600년에 두 대의 Windmill cart가 운행 중에 있었고 이 중 최소한 한 대는 28명의 승객을 태운 상태에서 시속 20마일의 속도로 주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Denis Papin은 당시 공기펌프를 발명한 17세기 독일의 물리학자 Guericke와 함께 공기 엔진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최초로 금속 피스톤과 실린더 등 엔진의 기본 부품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후 공기엔진은 1799년에 영국에서 특허출원이 되어 1832년에는 공기의 힘으로 가는 차량이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Cugnot 이후 증기 자동차는 프랑스와 미국, 영국에서 현저히 발전되었는데 파리에서는 1800년에 이미 증기버스가 운행중이었고 미국에서도 한 메사추세츠 주 Salem 출신 사람과 커네티컷 주 Hartford 에 거주하는 Apollos Kinsley가 1790~1800년 사이에 증기자동차를 운행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한편 영국에서는 철길을 이용하지않은채 레일없는 자동차가 도로를 달린다는 꿈은 이전까지 환상에 불과하였으나 증기 자동차의 출현으로 현실화가 되었다. 따라서, 증기자동차로 가장 성공을 거두었던 1830년대에는 런던에서 캠브리지 구간 등을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등 야심적 활동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으로부터는 기계류에 대한 반감 (Anti-Machinery Attitude)을 가져와 당시 톨게이트를 지나는데 기존의 horse coach는 3 펜스만 냈지만 steam coach는 5 파운드를 지불해야 했다. 또한 증기 자동차의 발전을 저해하였던 결정적 계기는 빅토리아 여왕시절인 1865년에 제정된 일명 “Red Flag Act” 라고도 불리운 “Locomotives on Highways Act” 로써 이 법에 의거하여, 시내에서의 운행속도를 시속 2마일로만 허용하고 교외 지역에서만 4 마일로 제한할 뿐 아니라, 모든 증기 자동차에 세 명의 승무원이 탑승해야하며 이 중 한명은 붉은 깃발을 흔들며 보행자가 있을 때는 경적을 울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법률 규제의 배경에는 보행자와 마차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되었지만 이로 인하여 영국은 증기 자동차의 개발이 결과적으로 30년이나 늦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많은 엔지니어들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차산업 쪽으로 노력을 집중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1870년대 말까지 자동차 개발에 대한 연구 노력은 대부분 프랑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 엔지니어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같은 기간동안 미국, 프랑스, 독일 및 덴마크에서는 경량의 증기 자동차가 계속해서 개발, 제작되었으며 특히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속도에 대한 열정은 강렬하여 Stanley 형제들이 1906년에 제작한 증기 자동차는 시속 127.66 마일의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하여 1900년에 Locomobile이라는 이름으로 약 천 대를 제조,판매한 증기 자동차는 미국에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최초의 자동차이기도하다.

그러나 Cugnot를 선두로 하여 증기 자동차는 1800년대 전체를 통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개선되었지만 1800년대 말까지도 증기 기관은 여전히 차체가 무겁고, 엄청난 양의 석탄이 소모되며 물을 끓이는데 소요되는 시간 또한 오래걸리는 데다가, 쉬지않고 계속해서 물을 보충해 주어야하는 등 비효율성 문제때문에 철도와 수로를 이용한 수송이 여전히 더 효율적이었고 일반 도로용 자동차 (road vehicle)의 필요성이 인식되지 않은데다 자동차 개발에 필요한 재정지원 등 인센티브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로 이후에 출현한 개솔린 내연 자동차와 경쟁할 수 없게 된다.


2.2 전기자동차의 출현


Scotland의 Robert Anderson은 1832~1839년에 전기 자동차를 최초로 개발하였고 1842년에는 미국의 Thomas Davenport 와 Scotsmen Davidson이 좀더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둘다 충전이 불가능한 축전지를 사용하였다. 이 후 프랑스의 Gaston Plante와 동료인 Camille Faure가 1881년에 충전이 가능하도록 축전지를 개발하므로써 전기 자동차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 벨기에사람 Camille Jenatzy는 1899년 La Jamais Contente라 불리는 전기로 가는 경주용 자동차를 만들어 시속 68마일의 세계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Iowa의 William Morrison이 1890년에 시속 14마일의 전기 자동차를 만든 이후 전기 자동차가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1900년 대 초 미국의 자동차 구성비율은 증기 자동차가 40%, 전기 자동차가 38% 그리고 개솔린 자동차가 22%로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 전기자동차가 인기를 누린 이유로는 초기 개솔린 자동차가 운행시 진동이 심하고 기아 변속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증기 자동차는 시동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운행거리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반하여, 전기자동차의 경우 시동이 간편하고, 운행시에는 소음이 없으며 유지하는데도 용이한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도 축전지 충전에 필요한 infrastructure의 결핍으로 한계에 봉착하였는데 전기자동차도 충전하는데에 필요한 소요 시간이 너무 길 뿐 아니라 많은 양의 축전지 소모가 따랐고 전차의 경우 시내 구간의 대량 수송은 용이하였지만 속도가 너무 느린데다 개인이 교외 지역으로 여행하기에는 효율적 수단이 되지 못하는 등의 내적 요인과 텍사스 유전 개발로 인한 유가하락, Henry Ford의 내연 기관 자동차의 대량생산 시대 개막으로 인한 가격 경쟁력의 불리함 등 외적 요인으로 인하여 1920년까지 누렸던 그 인기를 접어야만 했다. 그 예로1912년 당시 전기 자동차의 평균 가격이 $1,750인데 반하여 개솔린 자동차의 판매 가격은 $650에 불과하였다.


3. 개솔린 자동차의 발명과 발전


3.1 개솔린 자동차의 발명


대부분의 자동차 역사가들은 Karl Benz를 근대 자동차의 발명가로 인정하고 있다. 그는 1885년 독일의 Mannheim에서 사행정사이클 (four stroke cycle)의 개솔린 내연기관 (internal combustion engine)으로 만든 삼륜 자동차인 Motorwagon을 제작, 이듬해인 1886년 1월 29일 특허를 획득함으로써 공식적인 자동차의 출생 증명서 (birth certificate) 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Gottlieb Daimler는 Wilhelm Maybach와 함께 1886년 3월 8일 세계 최초로 사륜 자동차를 제작, 1887년에 특허를 받았다. 특히 Daimler가 제작한 엔진은 크기가 작고, 중량이 가벼우며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개솔린 분사 카브레터를 사용함으로써 근대 자동차 엔진의 시제품 (prototype)으로 인정받고 있다.


3.2 내연 기관의 발달


개솔린자동차는 기존의 전기 자동차가 배터리 충전을 이용한 전력과 달리 우선 개솔린연료를 필요할 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벨기에 태생의 Jean Joseph Lenoir는 프랑스로 이주한 후 1859년, 석탄 가스를 사용한 간단한 이행정 내연기관을 발명, 1860년에 특허를 받았다. 이는 이전의 외연 기관 (external combustion)을 내연 기관으로 최초로 개발한데에 의미가 있으며 이 후 독일의 Otto가 이를 개선하여 사행정 내연 기관으로 개발하였다. Lenoir는 이 업적으로1870년 파리 시민권을 취득한 후 1881년 프랑스 정부로 부터 “Legion of Honor”를 수여 받았다. 그러나 Lenoir의 엔진은 너무 작고, 마차를 끌기에는 비효율적이라 인쇄용 프레스나 선반 (lathe)또는 워터 펌프같은 기계류에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Alphonese Beau de Rochas는 1862년 사행정이론을 발견, 특허를 받았지만 엔진 자체를 만들지는 않았고 나중에 법원으로 부터 특허 취소를 당한 바 있다. 이 후 독일 태생의 오스트리아 엔지니어 Siegfried Marcus는 1870년 개솔린 엔진을 간단한 손수레에 장착하여 약 500 피트를 운행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개솔린 파워 자동차의 선두 주자로 평가되며, 1888-1889년에 Moravian (현재의 체코) 회사인 Marky, Bromousky & Schulz사에서 제작한 소위 “Second Marcus Car”는 Vienna의 기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몇 몇 역사가들은 그가 이미 1875년에 두번째 차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Karl Benz의 1885년 최초 자동차 발명을 뒤집지는 못하고있다. 소위 “Second Marcus Car”는 four-cycle 엔진으로 개솔린을 연료로 처음 사용한 카브레타와 전기 발전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이 자동차는 American Societyof Mechanical Engineers로부터 “기계 공학의 역사적 지표”로 명명되어 있다. 사실 Marcus는 16개 국에서 131개나 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동차 관련 특허는 하나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신이 자동차를 발명했다고 주장한 적도 없는데, 1898년 오스트리아 자동차 클럽에서 자동차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Marcus를 ‘guest of honor’ 로 초대하였을때도 그는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묻는 질문에 그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일 뿐이라며 부정한 바 있었다. Marcus 사후에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는 그를 명예의 묘지 (Honorary Tomb)으로 이장시켰으며 1950년과 1987년에 각각 그의 Second Marcus Car를 가지고 Vienna 거리에서 그를 기리기 위하여 기념 운행한 바 있다. 이와는 반대로 Marcus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은 Nazis 점령 기간 중 그의 이름과 모든 기념비들을 없앴는데 오스트리아 정부는 Nazis가 전시중 폐기 하였던 비엔나 기술 대학교 앞의 동상을 전후에 다시 세우기도하였다. 또한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시 Ministry for Propaganda의 지령으로 근대 자동차의 발명가로 기재되었던 그의 이름을 독일의 모든 백과사전들에서 삭제한 후 대신 Daimler와 Benz의 이름들로 대체하였다. 한편, 독일의 Nikolaus August Otto는 동료인 Eugen Langen과 함께 Lenoir와 de Lochas의 설계들을 개선하여 1876년에 소위 “Otto Cycle Engine”이라 불리는 최초의 실용적인 사행정의 내연기관을 제작하였다. 즉 Otto의 흡입(intake), 압축(compression), 폭발(power), 및 배기(exhaust)의 사행정 엔진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후의 액체 연료를 사용하는 모든 자동차에 공통적으로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엔진들은 여전히 무거워 자동차 엔진으로 사용하는데에는 가치가 별로 없었다.


3.3 Karl Benz와 Bertha Benz


Karl Fridrich Benz는1844년 11월 26일, 독일의 Baden Muehlburg에서 철도 기관사의 아들로 태어나 두 살때 철도사고로 부친을 잃었으나 가난속에서도 모친의 교육열로 무사히 정규교육을 마칠수 있었다. Karl Benz는 어려서부터 내연 기관이 언젠가는 말을 앞지르고 세계 운송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다. 그는 가난과 주위의 냉소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않고 정진하여 세계 최초의 개솔린 내연 기관 자동차를 발명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Karl Benz는 Karlsruhe University를 졸업한후 몇몇 회사에서 일하다 독립하여 1871년 Mannheim에서 파트너인 August Ritter와 건축자재를 공급하는 회사를 실립하였으나 실패하자 Karl Benz의 약혼녀인 Bertha Ringer가 자신의 결혼 준비금으로 동업자의 지분을 인수하여 문제를 해결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업 유지비용으로 지출부담이 늘게되자 거래은행에서는 투자자들을 참가시키는 주식회사를 설립토록 강요하여 1882년에 부득히 주식 회사로 전환하였지만, 자신의 신 제품 개발에 그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지 않자 이듬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 후 자전거를 자신의 평생 취미로 갖고있었던 Karl Benz는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자전거 수리점을 1883년에 설립, 제법 성공하자 그의 오랜 염원이었던 “horseless carriage” 설계를 다시 시작하였는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자전거의 유사한 기술들을 자동차 개발에 이용하였다. 그 결과 1885년 마침내 개솔린 연료를 사용하여 자체 동력을 내는 사행정 내연 기관 자동차를 만들고 Motorwagen 으로 명하였으며 이듬해인 1886년 1월 29일 “개솔린 연료 자동차”로써 특허를 받았다. Karl Benz 는 최초의 자동차를 완성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공장에서 시험 주행하였을 때 Bertha Benz는 너무나 기뻐 손벽을 치면서 자동차 뒤를 쫒아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초기 1888년 형은 기어가 없어 언덕을 올라갈 수 없었지만 이러한 한계는 그의 아내 Bertha Benz가 남편의 차로 장거리 여행을 마친 후 기어를 추가장착시킬 것을 제안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즉 남편의 평생 사업 동반자로서 Bertha Benz는 1888년 8월 5일 아침 남편이 다른 일을 하고있는 동안, 남편 몰래 14살 15살 된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이 만든 자동차로 친정을 방문하러 Mannheim에서 65마일 떨어진 Pforzheim까지 운행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거리 자동차 여행으로 기록되어 자동차의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다.

초기의 소비자들은 개솔린을 하나의 세척제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약국에서 소량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중간중간에 여러 약국에 들려서 연료를 주입하기도하고, 기술적, 기계적 문제가 생길때마다 혼자서 직접 수리를 해가며 여행하였다. 또한, 그녀는 긴 내리막 길을 내려온 후 구두가게에 들려 브레이크 브랔에 가죽을 붙히도록 주문함으로써 브레이크 라이닝을 발명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밤늦게 친정에 도착한 이들은Karl Benz에게 무사히 도착하였음을 전보로 통지해 주었다. 그녀는 곧 Benz Motorwagen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으로부터 Motorwagen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실제로 시도를 한것이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마케팅을 몸소 실행하였던 평생의 헌신적 내조자 Bertha Benz때문에 Karl Benz가 성공할수 있었다며 Bertha Benz없이 단순히Karl Benz를 논한다는 것은 반만 기술하는 것으로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오늘 날 독일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 2년 마다 행사가 열리며, 독일 정부는 Mannheim에서 Heidelberg를 거쳐 Pforzheim까지의 194 킬로미터 구간을 2008년부터 공식적으로 “Bertha Benz Memorial Route”로 승인하였다. Bertha Benz의 성공적인 장거리 여행 이 후로 Karl Benz의 설계의 정교함과 훌륭한 품질과 성능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갖던 사람들로부터 Benz의 이름이 점차 널리 알려지자 주문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1889년엔 직원이50명으로 늘어나고 1899년에는 572개의 자동차를 제작, 당시 유럽 최대의 자동차 제조회사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894년에 Velo라는 저가의 자동차를 새로 개발, 1901년까지 1200대를 판매하였으며, 1895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트럭을 개발, 몇 대는 버스회사에서 개조하여 “Netphener”라는 이름의 최초의 버스가 되었다. 또한 Karl Benz는 1896년에 최초로 flat engine을 개발하여 특허를 받았는데 일명 “Boxer”엔진으로도 불리는 제품은 현재까지도 Porsche나 Subaru와 경주용 차에 쓰이며 BMW 모터싸이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변화를 싫어한 그는 Marcus 만큼이나 독선적인 성격으로 자신이 만든 최초의 차량들에 대한 재개발에 반대하였다. 이 후 Daimler와 Maybach의 연속적인 우수한 성능의 자동차들이 계속 개발되자 회사 임원들은 Benz와의 사전 협의없이 프랑스 설계 엔지니어들을 채용함으로써 그는 1903년 1월 24일 자신이 설립하였던 회사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1929년 사망시까지 이사회 이사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한편 Karl Benz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불황의 여파로 재정난에 봉착, 이를 극복하고자 DMG와의 협력을 제의, DMG는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하였으나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마침내 1924년에 상호 이해 합의서 에 서명함으로써 2000년까지 상호 공동으로 개발, 생산, 구매 및 판매에 합의하였으며 1926년 6월 28일에는 두 회사가 Daimler-Benz Company로 합병하고 모든 차종을 Mercedes Benz로 명하기로 하였다. 그의 70회 생일이던 1914년에는 모교인 Karlsruhe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3.4 Daimler와 Maybach


Gottlieb Daimler


Gottlieb Daimler 는 독일의 Schorndorf에서 baker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에 총기산업에서 일을 하였으나 기계 공학 전공에 뜻을 두고 직장을 떠나 Stuttgart에 있는 Polytechic School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몇 몇 금속 회사에서 일을 하다 1872년에 당시 Nikolaus Otto가 공동 소유하고 있던 엔진 제조회사인 Deutz-A6사에 평생 동지인 Wilhelm Maybach와 함께 입사하여 기술 이사로 재직하면서 Otto와 함께 개솔린 엔진 개발에 주력하였다. 이 후 Otto는 1876년에 Otto Cycle로 알려진 사행정 엔진을 발명하여 이듬해인 1877년에 특허를 받았는데 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증기 엔진을 대체하는데에 주 목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그러나 Daimler와 Otto사이에 심각한 개인차로 Daimler는 특허 보상료를 받고 1880년 해고되었고 Maybach도 곧 그 회사를 떠났다. Daimler와 Maybach는 1882년 독일 남부 지방의 Stuttgart로 재이주해 Cannstatt의 여름별장을 구입한 후 그 집을 개조하여 작업장으로 사용하였다. 이 후 이들은 통상 메탄가스를 주 연료로 사용해왔던 기존의 Otto가 제작한 사행정 엔진에 어떤 연료가 가장 적합한가를 장시간 토론한 끝에 당시 주로 세척제로 사용되어왔던 석유(Petroleum)을 쓰기로 결정하고 개솔린을 공기와 혼합할 수 있는 카브레터를 개발하였으며 가볍고 빠른 수직 시린더의 엔진을 개발, 1885년 자전거에 장착하여 Maybach가 시속 7 마일로 약 2마일을 시운행 하므로써 세계최초의 모터싸이클을 발명하였으며 “Vehicle with gas or petroleum drive machine” 으로 특허를 취득하였다. 또한 그들은 1886년 3월8일에 Daimler 부인의 생일 선물로 Stagecoach위에 모터 싸이클에 장착하였던 엔진을 탑재하여 세계 최초의 사륜자동차가 되었다. 한편 Daimler의 욕망은 되도록 많은 방법으로 엔진을 사용하려 하였는 바, 1886년에는 엔진을 보트에 장착하여 Neckar 강에서 시험, 6노트 속도로 달리게하여 세계 최초의 모터 보트가 되었으며, 보트 엔진은 곧 수년 동안 Daimler의 주요 생산품이 되었다. 또한, 1888년에는 Ballon에 엔진을 장착하여 최초의 비행기(airship)로 간주되고 있다. Daimler와 Maybach는 이 후 1889년 10월 Paris Exhibition에서 고속 사행정 petrol engine으로 만든 4스피드 기어박스의 V형 2시린더로 된 최초의 자동차를 만들어 대중 앞에서 선보였으며 1890년에는 Daimler Motoren Gesellschaft (DMG)를 설립, Maybach를 Chief Designer로 임명하고 육로, 수로, 공중 운송을 위한 작고, 빠른 속력의 내연 기관 제작에 전념하였다.

그가 평소에 스케치하였던 이러한 세 가지 용도, 즉 땅, 바다, 하늘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목적을 가리키는 별은 오늘날 모든 Mercedes-Benz의 로고로 등록, 사용되고 있다. Daimler와 Maybach는 비록 회사는 설립하였지만 엔진이 제대로 판매되지 못하고 들어오는 특허료도 시원치않아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자 자본 유입을 위하여 부득이하게 세 명의 자본가를 영입하여 같은 해 11월에 공기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자본 유입 이 후 회사는 확장되었지만 새로 영입된 투자자들은 Daimler와 Maybach가 자동차 생산에 우선을 두고 계획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않고 당장 채산성있는 산업용 엔진 시설 확충에만 주력하면서 심지어는 Daimler가 이전에 사직한 바 있는 Otto회사인, Deutz-A6와의 합병까지도 고려하였다. Maybach는 이사회 자리마저 거절당함으로써 회사 설립 이듬해인 1891년 2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집에서 Daimler의 재정 지원하에 자동차 설계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Daimler 또한 투자자중 한 명인 Lorenz와의 사이가 계속 악화되자 마침내 의사 결정에 필요한 대주주가 되기 위하여 추가로 102주의 주식을 매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기술 이사로 좌천되었다. 더우기 다른 이사들은 Daimler가 만약 그가 소유한 모든 주식과 지난 30년간 소유했던 개인 특허 모두를 팔지않으면 회사를 파산시키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수락 66,666 goldmarks를 받고 1893년에 사임함으로써 독일 역사가들은 이러한 투자자를 영입한 것이 악마와의 계약으로 평가하고 있다. 1894년에 Maybach는 자신의 아들 Karl과 Daimler와 함께 “Phoenix”로 불리는 4기통으로 된 세번째 엔진을 설계하여 DMG로 하여금 생산토록한 후, 이 엔진으로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 경주인 “Paris to Rouen 1894”의 petrol 엔진 분야에서 우승하게 되었으며 곧 세계의 주목을 받게되었다.

두 발명가와 DMZ운영진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결국 1894년에 영국의 산업가인 Frederick Simms는 Phoenix 엔진 사용권과 관련한 라이센스 구매계약시 Daimler를 복직시키는 조항을 내걸었기 때문에 Daimler와 Maybach는 그들이 설립한 회사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 Daimler는 1900년, 심장병으로 사망하였으며 1978년 “Automotive Hall of Fame”으로 헌정되었다.

그가 평소에 내걸었던 모토인 “Das Beste oder nichts (Nothing but the Best)”는 등록상표로 사용하고있다.


Wilhelm Maybach


한편, Wilhelm Maybach는 1846년 Heilbronn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8살때 Stuttgart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는데 10살때 모친을 여의고 13살에 부친마저 사망함으로써 친척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다. 이 후 자선 사업가 Gustav Werner의 도움으로 Maybach는 Werner가 설립한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Maybach의 기술적 재능을 발견한 Werner는 그를 동 학교의 엔지니어링 워크샵으로 보내 재능을 개발하게 도왔다. Maybach는 15세에 산업 디자인 분야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공립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으며 19세때까지 산업용 엔진 작업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그의 작업장 매니저였던 Daimler의 눈에 띄어 그의 조수로 발탁된 후 Daimler가 1900년 사망 시까지 평생동안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Daimler가 가는 직장마다 따라 다녔으며 1878년에는 Daimler 부인의 소개로 그녀의 친구와도 결혼하였다. 또한 Maybach는 Daimler가 Otto와 심하게 다툰 이후 직장을 그만두자 자신도 곧이어 회사를 떠나 함께 회사를 세웠으며 Daimler와 공동으로 자동차 제작을 하는 등 모든 운명을 함께 하였다. 특히 Daimler는 주로 회사운영을 맡고 Maybach는 설계 부문을 담당함으로써 Daimler의 이름으로 개발되고 특허받은 모든 제품이 실제로는 Maybach와 공동 작품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Daimler 사후에 Maybach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자동차를 설계하였다. 1900년, 당시 오스트리아의 자동차경주 선수였던 Emil Jellineck은 자신의 사양(specifications)에 따라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해 줄 것을 주문함으로써 35마력의 시간 당 40마일로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를 제작, 일련의 경주에서 계속 성공할 수 있었다. Maybach는 이 엔진에 Emil Jellicek의 10살난 딸인 Mercedes Jellineck의 이름을 따와 Daimler-Mercedes로 명명하였으며 DMG는 공식적으로 Mercedes 상표를 1902년 6월에 등록하였다.

이후 유럽의 상류 사회는 대량으로 자동차를 구입함으로써 회사 중역들로 하여금 자동차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하였고 생산량의 증대로 DMG는 그 크기와 직원 수에 있어서 크게 확장되게 되었다. Maybach는 뒤이어 계속해서 70마력 6기통 엔진과 경주용 차량용의 120마력 엔진 등을 개발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는 그를 Chief Engineer에서 Inventor’s Office로 전직시킴으로써 1907년 또다시 회사를 떠나야했다. 이 후 Maybach는 그의 아들 Karl Maybach와 함께 회사를 설립, Zeppeline의 비행기 엔진을 제작, 꾸준히 납품하였으며 1차 세계 대전 이후 1919년에 채결된 Versailles 조약에 의거, 더이상 독일에서 비행기 제작이 불가능해지자 1921년부터는 6기통, 12기통 등 값비싼 Maybach 리무진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역사의 아이러니는 Maybach와 그 아들Karl이 Maybach 자동차를 한번도 가져보지 못하고 열심히 만들기만 한데 있었다. 특히Wilhelm Maybach는 아예 일생동안 자동차조차 가져보지 못하였으며 걸어다니거나 Tram을 탔었다. 따라서 근대 자동차 발명의 개척자로 인정받는 Daimler가 생전에 자동차를 한번도 운전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전 유럽에서 자동차 제작의 왕으로까지 칭송받던 Maybach도 발명가로써만 남아있었다. 그는 1929년 12월 29일에 사망하였으며 2002년부터 Chrysler와 합병하였던Daimler AG는 그의 이름으로 된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해서 현재 미국에서도 대당 약 50만불에 판매되고 있는 인기 자동차이다.


3.5 자동차 제조 업체의 출현


Carl Benz가 설립한 Benz & Co와 Daimler가 설립한 DMG 이외에 프랑스에서는 Penhard & Levassor와 Peugeot에서 Daimler의 엔진을 라이센스 받아 1899년과 1891년에 각각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Penhard와 Levassor는 파리 유명 공대 출신 동기로서 자동차를 생산하면서 그들이 개발한 소위 “System Penhard”는오늘날 사용되는 자동차의 기본 골격을 갖추므로써 이 후 모든 자동차의 기준이 되었다. 이 둘은 Armand Peugot로 하여금 Daimler 엔진 기술을 공유하도록 허용해 따로 생산하게 하였다.

한편, 미국 New York 주 Rochester 출신의 George Selden은 이 행정 개솔린 내연 기관을 설계하여 1879년에 특허를 신청한 후 16년간 끈질기게 보완 서류를 제출하여 마침내 1895년 11월 5일 특허를 출원하였다. 이후 그는 1811년 Henry Ford 등의 제소로 법원이 취소할 때까지 미국내 생산되는 모든 차량에 대하여 특허료를 받았는데 자신은 실제로 한 번도 자동차를 만든적이 없었다. 또한 Charles Duryea는 그의 형제 Frank와 함께 1893년에 미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Duryea Motor Wagon Company를 설립한 후 개솔린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후 처음에는 증기 자동차를 생산하던 Ransome Olds가 “progressive assembly”라는 조립라인을 개발하여 1901년부터 최고 인기의 “Curved Dash” Oldsmobile을 생산하였고 1904년까지 선두 업체가 되었다. 그러나 Olds가 대량 생산 방식으로 운전하기 쉬운 저가격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였을때 Detroit의 투자 동업자인 Samuel Smith는 크고 값비싼 모델을 원하여 Olds는 1904년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 후 Oldsmobile사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1908년 GM사에 합병되고 말았다. 곧이어 Henry Ford는 저가격 자동차를 생산하여 자동차를 사치품목에서 필수품으로 전환하는 자동차의 혁명을 가져왔다.

1920년대 이후 마국내 대부분의 자동차 업체는 대량 생산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소비자 욕구에 맞는 차를 만들어야하는 마케팅 단계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때 소위 근대 미국 경영의 창조자로 불리는 MIT 공대 출신 Afred Sloam이 GM사장에 취임한 후 회사를 Chevrolet, Oldsmobile, Pontiac, Buick, Cadillac Division으로 나누어 각 사업부 별로 매년 모델을 개발, 변경토록하되, 다른 사업부 모델과 중복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소득이 바뀌더라도 GM제품을 계속 사용하게 만드는 전략을 이용하였다. 또한 부품을 각 사업부에서 공동으로 사용케함으로써 원가절감을 가져오게하여 1923년 취임 당시 Ford의 시장 점유율이 60%, GM은 12%였으나 변화를 꺼리고 Model T만을 고집했던 Ford를 제치고 GM은 1930년대부터 세계 최고의 자동차 업체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치열한 경쟁하에서 미국 내 자동차 업체 수도 점차 감소하여 1920년에 200여개에 달하던 것이 1930년에는 43개로 줄고, 대공황 이후에는 17개 회사만이 남게 되었다.

흔히들 1925~1935년 사이를 크래식 자동차 시대라 부르는데 이는 Rolls-Royce Silver Ghost와 Bugatti, Maybach 및 Mercedes-Benz등에서 최고급 차종을 선보였기 때문이며 특히 프랑스의 Ettore Bugatti는 1930년에 제작한 Bugatti Type 41(일명 Bugatti Royal)은 싯가 약 천만불의 현존하는 가장 값비싼 자동차로써 평가받고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동차 산업은 고급 차종을 만들던 회사들이 거대 기업에 흡수되는 등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M&A 바람이 불었는데 특히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던 Ferrari 등 고급 차종을 생산하던 회사들은 Fiat와 같은 대기업에 흡수되어 그들의 경영 지배하에서 기존의 차량을 개발, 생산하고있다.

특히1960년대 들어 급부상한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소형화, 경량화에 따른 저가격 차량을 만들어 해외시장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여, 1970년 오일 사태 이후 시장 지배율을 더욱 넓혔고, Toyota의 경우 현재 세계 자동차 판매 1위의 위치까지 점하기 시작했다.

3.6 대량 생산의 발명가 Henry Ford


미국의 Henry Ford는 비록 자동차를 직접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콘베어 시스템에 의한 조립라인을 자동차 산업에 도입한 후, 저렴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함으로써 오늘날의 자동차를 가능하게 한 자이다.

사실 1900년 대 초기만 해도 모든 자동차들이 대부분 개별적으로 제조되었기때문에 차 한대당 생산 원가가 당연히 높아 상류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사치 품목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그는 단위당 이윤을 적게하면서도 대량으로만 생산한다면 저가격에서도 경량의 강력하고도 빠른 개솔린 자동차를 판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Henry Ford가 처음은 아니었다. 즉 1907년 Alanson Brush도 일반 가정에서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도록 대량생산을 시도한 바 있었으나 나무재질을 주로 사용한 자동차는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Henry Ford는 1903년 Ford Motor Company를 설립한 후 1906년 “Model N”을 생산, 그 성공을 기반으로 1908년 “Model T”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3년까지 조립라인 공정을 기계화하고 공정별 작업의 단순화를 위하여 13,300명의 노동자를 채용하여 한 공정만 담당하게 하였고, 표준화된 부품으로 산재한 여러 공장에서도 연속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에 따라 종전에는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대당 12.5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이후에는 대당 93분만에 생산하므로써 여덟배의 생산성 증가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1916년까지 Model T의 년간 생산량은 칠십만대를 넘었고 sticker price도 대당 $345까지 떨어졌으며 1927년까지 약 천 오백만대가 판매되었다. 그 결과, 공장 노동자도 3,4개월치 봉급으로 Model-T를 살 수 있었고, 중산층도 이제는 자동차로 주말에 먼 친척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자동차로 장을 보러가는 것이 일상의 평범함 일이 되었다.

반면, 당시 유럽에서는 낮은 소득 수준과 고유가, 그리고 고마력에 대한 특소세 등의 세금부과로 시장규모가 미국에 비해 월등히 작기때문에 대량생산에 의한 저가격 차량 판매는 현실성이 없어 값비싼 고급차량만을 지속적으로 생산하였다. 물론 Ford도 품질문제과 대량 생산간의 균형을 맞출 필요성은 인식하였지만 유럽 자동차들과는 달리 세밀한 끝 마무리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 모양새보다는 오직 기능성에 집중하는 직관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전 제조공정의 기계화와 효율적 분업을 통한 높은 임금과 높은 효율의 조합을 “Fordism”으로 정의하는데 Fordism은 같은 작업을 하루에도 수 백번씩 반복하게 하므로써 인간의 로버트화를 가져왔다고 많은 이들이 비판하여 왔다. 그러나 Ford는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여덟시간, 일주일에 사십시간만 일하게 하고, 당시 일반 자동차 회사에서 지불하던 일일 평균 임금 $2.36을 $5까지 파격 인상하였으며 그 해의 회사 이익에 따라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지급하였다.

법률적 정의에 의하면 “발명이란 하나의 새롭고도 유용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공정이나 기계 또는 제품을 말한다”(Invention is a new, useful, non-obvious process, machine, or product). 이 정의에 따라 Henry Ford도 오늘날의 자동차를 가능케 한 신개념의 자동차 발명가로 말할 수 있다 하겠다. 즉, 경제학자 슘페터 (Joseph Aloid Schumpeter)의 말처럼 기술 혁신의 결과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더 좋은 명주 양말을 신기는 것보다, 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공장 근로 여공들에게 똑같은 명주 양말을 저렴한 가격에 같이 신게하는데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오늘날 자동차는 이 만여개의 부품과 십 만이 넘는 특허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실 어느 한 발명가에게 모든 크레딧을 부여할 수는 없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연간 R&D 비용으로 180억 불이상을 투자함으로써 단일 산업으로는 최대 예산으로써 성능 개발은 물론 안전도, 연비 그리고 배기가스 분야의 개선을 위하여 꾸준히 연구해오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약 2억 5천만 대의 자동차가 운행 중에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매년 2,600억 갤런의 휘발유와 석유가 소모되고있다. 따라서 미국의 경우 평균 승용차 한대당 매년 5톤양의 이산화 탄소와 부수적으로는 이보다 작은 양이지만 일산화 탄소, 수소 등을 배출하고있다. California 당국이 추산하는 바로는 자동차 배기 가스가 지구 오존층 파괴에 약 30%를 차지하고있는 바, 중국이나 인도 등지에서 자동차 인구가 계속적으로 폭발하고있는 현 추세하에서 연비 문제와 배기가스 문제는 대체 에너지의 개발없이는 점점 심각할 수밖에 없다 하겠다. 한편 자동차 안전도 문제도 심각하여 세계적으로 해마다 120만명이 사망하며 미국에서도 매년 4만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그 40배에 달하고있다. 자동차 치사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자동차 안전장치의 개발과 도로 조건의 개선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미국의 경우 교통부에서는 도로 건설과 보수 유지에 연간 400억 불을 예산 집행하고 있다. 또한 소비자 운동의 기수인 Ralph Nader 변호사 등의 주장에 의하여 자동차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 제조업체로 하여금 보다 더 안전한 차량을 제작하도록 1960년대 말부터 연방 차원의 자동차 안전 기준 (Federal Motor Vehicle Safety Standard: FMVSS)을 제정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통부 산하에 전국 고속도로 교통안전 당국 (National Highway Traffic Safety Administration: NHTSA)으로 하여금 미국내 판매되고 있는 모든 차량에 대하여 25마일 충돌 테스트 등 정기적인 안전도 문제를 분석하고, 새로운 안전도 관련 기술을 자동차에 적용하도록 법령을 꾸준히 수정하고있다. 그 예로 금년 1월 13일에는 차량 전복시 승객의 치사율을 감소하기 위하여 2018년까지 만 파운드 미만의 모든 자동차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대형 사이드 커튼 에어백 (larger side curtain airbag)을 장착하도록 공표하였는데. 사이드 에어백이 장착되더라도 대당 $31의 추가 부담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십여년전 한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근무당시 열에강한 전도체를 신소재로하여 일본의 신간선 열차처럼 일정속도가 붙으면 자기의 형태로 도로면에서 뜨는 날으는 자동차를 개발해 보겠다고 연구실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동료들을 보았는데 George Lucas의 Star Wars 영화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날으는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고 장을 보는 시대가 오리라 믿는다. 자동차업계는 현재 나름데로 Hybrid나 태양열 에너지 등 대체 에너지 연구는 물론 자동차 치사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로버트를 대신이용하여 사람이 운전하지 않아도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 (driverless car)를 2020년 목표로 열심히 개발중에 있다. 이렇게 되면 머지않아 음주 운전이 더이상 존재하지않을 뿐아니라 자동차 사고로 더이상 희생되는 일이 없는 날이 오리라 기대되며 자동차보험료 때문에 고민하는 문제들도 현저히 감소되리라 믿는다.



김 인학


(1886 Benz Patent Motorwagen No. 1)

1,426 views0 comments

Commentaires


bottom of page